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레너드 번스타인 (문단 편집) == 에피소드 == * 지휘를 하는 영상물들을 보면 항상 머리를 [[포마드]]식으로 정리를 하고 나오는데 꼭 지휘를 한지 5분도 안돼서 머리가 축 늘어진다. 거의 다 그런 영상물이 대부분인데 그가 격정적으로 지휘를 하면 머리가 다 헝클어지고 늘어진다.[* 다만 사적이라면 모를까 그가 지휘하는 곳은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공식적인 자리이므로 머리 정리는 사회인의 예절로서 당연한 절차긴 하다.] 포마드를 할 때 머리가 고정이 잘 안됐는지는 알 수 없지만 땀을 많이 흘리는 그의 특성 상 머리를 고정해도 땀 때문에 헝클어 질 수도 있다. * 빈 필하모닉과 협연 할 당시에 비올라 주자인 묵크라는 사람은 그를 피했다고 한다. 그가 싫어서도 음악적 견해 차이도 아닌 자신이 알레르기 증상이 있는데 번스타인이 하도 지휘할때 폴짝폴짝 뛰어서 먼지가 일어나 뒤집어 쓰면 온 몸에 두드러기가 났기 때문이라고 한다. * 젊은 시절부터 진보주의 내지는 [[사회주의]] 경향을 강하게 드러냈다. 또한 초기 활동 시절 [[소련]]의 대표적인 작곡가들인 [[쇼스타코비치]], [[프로코피예프]], 미국으로 망명와 있었던 [[좌파]] 작곡가 [[한스 아이슬러]]의 음악에 상당한 관심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그의 사상적 경향 때문에 [[매카시즘]][* 1950년대 [[FBI]]가 번스타인을 [[사회주의자]] 내지는 [[공산주의자]]로 간주하고 사찰을 지속적으로 시행했다. 2000년대에 기밀 해제되어 공개된 내부 문건들에 의해 사실로 밝혀졌다.] 때 미국 정부의 요주의 인물로 지목되기도 했다. 번스타인은 [[인종차별]]과 [[베트남 전쟁]]에 대한 [[미군]]의 참전 반대 운동, [[신자유주의]]를 표방한 [[로널드 레이건|레이건]]과 [[조지 H. W. 부시|부시]] 행정부에 대한 비판 등에 가세하기도 했다. * 1979년에는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제5번을 뉴욕 필과 함께 처음이자 마지막이 된 [[한국]] 공연에서도 올렸는데, 당시 한국 측에서는 소련이 정권 선전을 위해 내세우고 있던 작곡가인 쇼스타코비치의 작품 대신 다른 대중적인 작품으로 바꿔줄 수 없냐고 요청했다고 한다. 하지만 번스타인은 곡목을 바꿔달라는 주최 측의 요구를 거부한 채 그대로 공연했다.[* 당시 번스타인은 한국, 일본을 비롯한 아시아 순회 공연에서 이 곡을 레퍼토리로 삼았기 때문에 다른 곡을 별도로 연주하는 것은 여건상 어려웠을 수도 있다. 한국 공연 직후 다음날 일본 공연이 예정되어 있었는데, 쇼스타코비치 연주문제 때문에 한국 정부와 껄끄러운 상황에서 공연 직후 김포공항으로 출국하려던 번스타인과 뉴욕 필의 수속이 크게 지연돼 번스타인이 화가 났다는 일화도 있다. 이후 번스타인의 한국 공연에 대한 회상은 꽤 부정적이었다고 한다. 1980년대에 한국의 모 음악잡지와 행한 인터뷰를 보면, 쇼스타코비치 작품에 대한 교체 요구뿐 아니라 소란스러웠던 청중들의 관람 매너에 대해서도 상당히 불만스러웠던 듯.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 한국 청중들이 매우 정숙하다며 큰 만족감을 표했던 것과 대조적. 아바도 역시 국내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내한 공연 때의 받은 인상이 부정적이었음을 표출한 바 있으며, 아바도 임기 동안 베를린 필의 내한공연은 끝내 실현되지 못했다.] 한편 번스타인은 같은 해인 1979년 하반기 빈 필에게도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5번을 연주하자고 제안했으나 거절당했다. 결국 당해 빈 음악주간 특별공연에서 연주하기는 했다. * 번스타인의 언변은 어렵게 느껴진 클래식의 대중화라는 명제를 꽤 훌륭하게 소화해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받지만, 한편으로는 오히려 한 동료 음악인과의 관계를 틀어지게 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1962년 4월에 [[글렌 굴드]]와 [[요하네스 브람스|브람스]]의 피아노 협주곡 제1번을 공연할 때 굴드가 템포를 기존 연주보다 훨씬 느리게 잡아달라고 했는데, 번스타인은 이 요청을 수락했지만 워낙 규모가 큰 협주곡이 느리게 연주되면 공연 시간에도 분명히 영향을 미칠 것으로 판단했다. 결국 개연 직전에 청중들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기 위해 무대에 나왔는데, 번스타인의 말투가 다소 [[개그맨]] 스타일이어서 오히려 청중들이 박장대소하는 상황이 되었다. 공연 후 해럴드 숀버그를 비롯한 몇몇 비평가들은 번스타인의 사전 멘트가 다분히 굴드의 연주 스타일을 비꼬는 [[어그로]]를 끌었다고 맹렬히 항의했고, 굴드도 그 이후로 번스타인과 협연하는 일은 없었다. 심지어 음반으로 녹음도 되었는 모양이다. 다만 비평가들의 생각과 달리 굴드와 번스타인의 개인적인 친분 관계는 그 후로도 계속 유지되었다.[* 하루는 굴드가 터번을 쓰고 머리를 안감은 상태로 번스타인의 집에 방문했다가 번스타인의 부인 몬테알레그레가 경악해서 머리를 감겨줬다는 에피소드도 있다.] * 번스타인과 라이벌 관계로 묘사되는 지휘자는 단연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다. 대중적으로 인기있는 미남 지휘자라는 점에서 둘은 겹치는 이미지가 있었고, 또한 비슷한 듯 하면서 상당히 다른 두 사람의 성향 때문에 둘을 비교하는 것은 클래식 팬들에게는 소소한 재미가 있는 떡밥이기도 했다.[* 번스타인은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매우 좋아하고 리허설 전에 단원들과 근황 얘기를 하며 잡담을 하는것을 즐길 정도로 사교적이었으나, 카라얀은 수십년을 지휘한 베를린 필 단원들과도 거리를 유지한 다소 내성적인 성격이었다. 그리고 번스타인은 지휘자, 교육자, 피아니스트, 작곡가 등 다방면에서 활약한 '르네상스 인'으로 유명한 반면 카라얀은 전무후무한 '클래식의 황제'로서 지휘와 관련된 활동(그리고 그것을 녹음, 영상화 하는 것) 외에는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또한 [[도이치 그라모폰]]에서 '베를린 필의 카라얀, 빈 필의 번스타인' 같은 식의 구도를 형성하며 홍보를 했던 점도 이 둘이 라이벌이라는 인식을 공고하게 했다. 둘 사이 관계는 표면적으로는 좋은 편이었다. 카라얀은 본인과 번스타인은 사이가 좋다고 말하기도 했다. 카라얀은 다른 음악가를 언급할 때 거의 칭찬으로 일관하며 다른 이들을 존중하는 사람이었고, 번스타인도 친화력이 뛰어났기 때문에 둘은 만나면 농담과 덕담을 주고받는 나쁘지 않은 관계였다. 한번은 카라얀이 호기롭게 '베를린 필, 빈 필 중 어디를 지휘하고 싶냐? 내가 주선해줄게!' 라고 하자, 번스타인은 '베를린필이 당신에게 반항하는 것을 보니[* 80년대 베를린필 단원과 카라얀의 갈등이 컸으며, 이 때문에 이전과 달리 카라얀과 빈필간의 연주가 늘었다] 건방진 녀석들이 틀림없어서 흥미없음'이라고 대답해서 카라얀을 기쁘게 했다는 에피소드가 있다.[*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번스타인이 베를린 필을 지휘한 사례는 1979년의 말러 9번 실황 연주를 제외하면 없다.] 서로 공통점도 꽤 많았다. 1957년에 처음 만났던 이유도 둘다 스키를 좋아해서였고, 지휘자 드미트리 미트로풀로스를 존경해서 셋이서 종종 만나고는 했다. * 하지만 액면 그대로 카라얀과 번스타인이 사이가 좋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두 사람이 서로를 상당히 의식하고 감정이 상하기도 했다는 정황은 꽤나 구체적으로 알려지고 있다. 실제로 번스타인의 경우 사적인 자리에서 카라얀에 대한 불편한 심정을 토로한 적이 있다. 가령 번스타인이 베를린필과 말러 [[교향곡 제9번(말러)|교향곡 9번]]을 연주한 직후에 몇달 간 악보를 돌려 받지 못했는데, 그 기간동안 카라얀이 말러 9번 녹음을 진행하자 자신의 해석을 참고했을 것이라 확신하고 불쾌해하며 이를 주변인에게 이야기 하기도 했다.[* 다만 악보만을 참고해서 지휘자의 해석을 그대로 가져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실제로 카라얀이 번스타인의 악보를 보고 베꼈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는 것이 중론이다.] * 다만 카라얀이 번스타인을 싫어해서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지휘하지 못하도록 방해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며, 이는 번스타인 본인의 지속적인 거절 때문이었다. 번스타인은 베를린 필과 거의 관계를 맺지 못했는데, 1979년에 전직 악단 단장이던 볼프강 슈트레제만의 초청을 받아 정기 공연이 아닌 [[국제사면위원회]] 자선 음악회의 객원으로 출연해 [[말러]]의 [[교향곡 제9번(말러)|교향곡 9번]]을 두 차례 공연한 것이 전부다.[* 이 공연 실황은 서베를린 주둔 [[미군]] 관할 방송국이었던 RIAS를 통해 운좋게 녹음되었고, 번스타인 사후 도이체 그라모폰에서 CD로 출시했다. 그리고 이는 번스타인 후기의 말러 9번 연주 중 가장 많이 추천되는 음반이다.] 훗날 슈트레제만이 밝힌 비화에 따르면 번스타인이 베를린 필을 단 한번 밖에 지휘하지 않은 것은 번스타인 본인이 번번히 거절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베를린 필 단장이었던 슈트레제만은 번스타인을 베를린 필에 초청하기 위해 부단히 애를 썼는데, 번스타인은 국제 엠네스티 자선공연이 아니면 베를린 필을 지휘하지 않겠다고 했고 베를린 필의 상주홀인 베를린 필하모니에서 지휘하지 않겠다고 했다고 한다. 이에 슈트레제만은 번스타인을 초청하기 위해 직접 국제 엠네스티와 접촉하여 자선공연을 주최하는 노력 끝에 간신히 번스타인을 초청하게 된 것이라고 한다. 1979년 이후에도 베를린 필 경영진은 번스타인을 초청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79년 공연 리허설 때 자존심이 강하기로 유명한 베를린 필의 일부 단원들과 마찰을 일으켰던 번스타인은 다시는 베를린 필 초청에 응하지 않았다.[* 다만 이것은 일부 단원들이었고 다수의 단원들은 번스타인을 다시 초청하길 원했다고 한다.] * 원래 1992년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신년음악회]]의 지휘자로 내정되어 있었는데, 1990년에 타계함으로 인해 불발되었다. 번스타인의 성격으로 볼 때 어느 해보다 재미있는 신년음악회가 되었을텐데, 말러 교향곡8번의 신전집 녹음 무산과 함께 팬들이 많이 아쉬워하는 부분이다. 대타로 [[카를로스 클라이버]]가 들어왔다. * [[The Great Escape]], [[십계(영화)|십계]](1959), [[고스트 버스터즈]] 영화 음악으로 유명한 엘머 번스타인 (Elmer Bernstein, 1922년 4월 4일~2004년 8월 18일)과 아무 혈연도 없지만, 둘 다 [[유태인]]이고 같은 성을 가지며 같은 음악가라고 살아 생전 사이좋은 친구였다. * Alpheus Music Writer 연필과 [[블랙윙(연필)|블랙윙]] 연필을 즐겨썼다고 한다. 참고로 그의 서랍 안에 이 두 연필이 몽당연필인 상태로 수십자루 있었는데, 그는 이 몽당연필들을 ‘작은 병사들’ 이라고 불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